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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이민

호주 이민- 살다가 우울증이 올때면

내가 한국을 떠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우울증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15년의 직장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었다. 주말, 공휴일 할 것 없이 일을 했었고 당시에 결혼을 안 한 상태라 기혼 직원들이 대타를 부탁할 때마다 거절하는 법 없이 일을 했다.

성실함이 알려지다 보니 회사에서는 원래 하는 직무와 더불어 직원들의 교육도 시키고, 사내에서 하는 여러 공모에도 참가를 하게 된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보니 일하는 날에는 괜찮은데 쉬는 날이 오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운도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가 계속됐다. 딱히 몸이 아픈 것은 아니어서 그냥 지내다가 상태가 지속되자 결국 가정의학과에 진단을 받으러 갔다. 병명은 우울증.. 약간의 충격이 왔다. 내가 우울증에 걸리다니. 

결국 우울증 때문에 나는 한국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이대로 살다가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옮긴 두바이에서는 우울증이 들어올 틈새가 없었다.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다음날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적응하기에 바빴다.

삶은 정말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타지에 있다는 우울감을 느낄 새도 없이 하루하루가 후딱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많았고, 두바이 후에 옮긴 베트남에서는 하노이라는 도시가 복작복작하기 때문에 내 우울감이 끼어들 새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호주에 와서부터 일 년에 한 번씩 끝도 없는 우울감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 여유로운 나라가 내게 생각할 시간을 많이 주고, 팬데믹이라는 사상초유의 사태로 한국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막히자 우울감이 극대화 됐다.

처음 1, 2년은 호주에 친구가 없어서 그러려니 생각을 했었다. 거의 5년 차인 지금은 친구도 많고 이것저것 하는 일도 많은데 그 정기적인 우울감은 여지없이 찾아와서 평범한 일상에 파동을 일으킨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력감, 아무 말도 하기 싫은 무관심,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고립감이 갑자기 찾아오면 남편도 덩달아 비상사태가 된다. 이 느낌 낯설지가 않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의 그 상태, 바람 빠진 풍선 상태이다.

호주에서의 우울감은 직장선택 때문에 찾아온 게 틀림없었다.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느낌.

이력서를 낸 곳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다. 두바이에서는 채용 과정에서 이력서를 받았다는 것과 면접을 본 후에 통과하지 못했다면 regret letter 등 standard letter가 항상 왔었다. 호주는 그런 게 절대 없다. 이력서를 받았는지, 면접에 통과를 하지 못했는지 등이 그냥 기다려야 하는 프로세스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다.

아무리 눈을 낮춰서 지원을 하지만 그래도 나는 호주에서 외노자-외국인 노동자이다.

그래도 집에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호주의 살인적인 물가. 싱글 인컴으로 살기에는 너무 팍팍한 생활이다. 더구나 사지가 멀쩡한데 집에만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job site를 아무리 뒤져도 내 구미에 맞는 곳이 없다. 

 

남편은 나름 나를 cheer up 해 준다고 한국, 두바이에서 이력이 좋기 때문에 당연히 면접을 보자는 연락은 올 것이라고 말을 을 하는데 아예 연락이 없다.​ 이쯤에서 고개를 드는 생각이, 나는 여기서 쓸모가 없는 사람이고, 아무도 나를 고용하고 싶어 하지 않고,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금이라도 떠나야 하는 게 아닌지 등등의 생각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결국에는 네 가지의 길이 있다. 

첫째는 한국에서의 경력을 뒤로하고 아주 단순한 노동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청소, 슈퍼마켓, 커피숍에서 all-rounder를 한다든지의 일이다. 이런 일은 일이 단순해 지겨울 수 있지만 호주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진짜 호주에 생활인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이 편하다고 정착했다가는 평생 단순한 노동만 할 수 있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1-2년만 하는 것을 추천한다.

둘째는 자영업자가 되는 길이다.

본인의 아이디어가 특출하면 성공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일하던 기술을 써먹을 수 있는 일이면 좋고 아니면 호주 마켓에 꼭 필요한 일일 수도 있겠다. 한국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take away 초밥집이나 커피숍, 슈퍼마켓을 많이 한다. 아니면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온라인 샵을 오픈하는 것도 옵션일 수 있겠다.

셋째는 retraining을 해서 처음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호주는 TAFE라고 해서 한국으로 말하면 직업 훈련 대학 같은 것이 있다. 영주권이상이면 정부에서 제공하는 무료 교육도 많이 있는데, 참고로 작년에는 aged care worker 교육이 무료였다. 그만큼 노인 돌봄에 대한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Aged care가 힘들 것 같으면 Child care도 있다. 

넷째는 다시 한국으로 가는 방법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호주는 정말 싱글인컴이면 살아가기가 힘들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데 마음이 절대 편할 리가 없다. 집에만 갇혀서 산다면 호주에 살 이유가 없다.

여기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라는 말이다.

 

여기 첫 번째 방법에 대한 예가 있다.

나보다 먼저 호주에 온 친구가 7년 동안 무직으로 호주에 있다가 2년 전에 wooworth라는 호주 슈퍼마켓 체인에 일을 구했다. 친구는 호주에서 accounting을 공부했는데 회계직원으로 근무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눈을 낮추고 낮춰 울월스에 취직을 했고 지금 2년째 일을 하고 있다. 

일의 장점은 일이 단순하고 쉬우며, 다양한 호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7년 만에 새로운 호주를 만나는 중이며, 단점은 일이 단순하여 미래가 없다는 점이다. 이 친구는 울월스에서 일을 하면서도 여러 군데 이력서를 뿌리는 중인데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온 곳은 없다. 

나이가 40대 이하라면 한국에서의 경력이 호주에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retraining을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는 거다.

내가 일하던 프라이스라인에서 일하는 약사도 네팔에서는 이미 약사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도 호주로 이민을 오면서 coles 슈퍼마켓에서 야채 채우는 일을 하면서 약사 공부를 새로 했고 얼마 전에 약사 자격증을 받아서 드디어 정식 약사로 일을 하게 됐다.

이쯤에서 나도 retraining에 동참해야 하는 것일까? 한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인생은 참 어렵다. 아니면 내가 인생을 어렵게 만드는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말이야, 삶이 위기를 맞이하면 어디론가 떠나야 돼.

떠나는 것으로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거든.

-드라마 닥터 차정숙 중-

내 삶에 위기가 닥쳤을 때, 나는 두바이로 떠났다. 그리고 돌파구를 마련했다.

지금은 어디로 떠나야 내 삶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